바르셀로나입니까?

내가 바르셀로나에 살게 될 거라는 ‘통보’를 받게 된 건 고작 6개월 전. 이미 남편은 2년 전부터 바르셀로나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졸업 후 어느 나라에 취업을 하게 될지는 몰랐으니까. 그리고 비자를 받기까지의 4개월은 다시 꺼내 보고도 싶지 않은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지금은 스페인의 모든 일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때는 하루 이틀이면 모든 일이, 심지어 친절하게 해결되는 한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 2개월 차. 아직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바르셀로나라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이 장면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

 처음 집을 구하러 다닐 때 머물던 곳은 테라스로 사그라다파밀리아의 알록달록 높은 지붕이 살짝 보이는 호텔이었는데, 5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하루 종일 네 다섯 곳의 집을 보러 다니다 지칠 대로 지쳐 돌아와 한국에서 가져온 재료로 주섬주섬 밥을 해먹고 가지고 온 몇 벌 안 되는 옷을 빨아 널면서 바라보는 유일한 마음의 안식 같은 풍경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보러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엔 항상 사그라다파밀리아가 두둥하고 나타나 

‘잘 다녀와 힘내!’

너무 걸어 다녀 아이 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날은 마음이 어찌나 무겁던지 차라리 남들처럼 관광하다가 이렇게 된 거였으면 나았을 텐데…. 당시는 정말 우리 예산으로 괜찮은 집을 구할 수 있을지 다니면 다닐수록 확신보다는 체념을 하게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남편에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평생 해보지 못했을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하곤 했었다.

걸어서 또는 버스로 숱한 유명 관광지들을 지나다니면서도 수많은 관광객 중 하나가 될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 부동산이 일하지 않는 주말에 구엘공원을 다녀왔다.
“와 오늘은 나도 관광객이다!”

처음 남편이 잘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쓰고 자비로 MBA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러니까 그때가 우리가 이곳에 살게 될 운명의 맨 처음이었을 것이다. 반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어쩌면 이 사람 덕분에 내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기대감의 반과 해외취업이 쉬운 일인가, 더 높은 연봉으로 한국에 재취업하면 우리 삶도 더 윤택해지겠지 하는 물욕의 마음이 반씩 섞여 나도 모르게 “그래 한 번 해봐”라고 세상 이런 자비로운 아내가 없는 것처럼 대답을 했더랬다. 그리고 그 중 하나-절대 둘 다는 아님-가 현실이 된 지금은, 아직까진, 행복한 꿈 같지도 불행한 악몽 같지도 않은 그런 날들로 낯선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Won 에디터

출판사에 근무하다 결혼과 출산, 너무도 평범하고 평화롭게 살던 서울 사람. 지금은 쉬운 듯 쉽지 않은 바르셀로나 생활을 막 시작한 꼬레아나 Won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