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LEDO

 

역사상 톨레도(Toledo) 지역의 첫번째 주인은 까르뻬따노(Carpetano)라는 민족이었습니다.이들의 톨레도 통치는 로마인들이 들어옴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는데, 로마인들은 이 지역을 톨레툼(Toletum)이라 명칭하였으며, 오늘날 톨레도라는 이름의 기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세기 동안 유지되었던 로마제국의 힘과 권력은 5세기부터 그 힘을 잃어가게 되었고, 결국 A.D 418년 비시고도인들에게 점령 되었습니다. 비시고도 왕국은 톨레도를 수도로 정하고, 수도가 된 톨레도는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그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톨레도에서 여러 차례에 걸친 종교 회의가 개최되면서, 톨레도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8세기에 접어들면서 711년 톨레도는 아랍왕 타릭에 의해 점령되는데, 이때부터 톨레도는 약 400년간 아랍제국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이슬람 제국의 침입 이후로 톨레도 뿐만 아니라 스페인 반도의 대부분 지역이 정복되기는 했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한 국토회복운동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까스띠야(Castilla) 왕국의 알폰소 6세는 1085년 톨레도 수복이라는 커다란 업적을 이루고, 알폰소 6세에 의해 까스띠야 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톨레도의 전성기는 13세기 그 절정을 이루게 되며, 특히 산 페르난도 3세, 현왕 알폰소 10세에 의해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카톨릭 국왕 부처 때에 이르러 톨레도는 더욱 더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외적으로 팽창하였습니다.

 

하지만 1492년 카톨릭 국왕 부처는 스페인 반도내의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리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톨레도 지역의 유대인들도 같이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톨레도의 거의 모든 공업과 상권을 유대인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추방은 톨레도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561년 펠리페 2세는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톨레도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그 중요도를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톨레도는 다양한 문화, 종교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다양한 역사적 유적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역사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코도베르 광장

 

소코도베르 광장은 톨레도 시내에 위치한 광장으로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했던 시기에는 가축시장이었고, 축제와 투우 등이 열려 도시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입니다.

현재는 과거처럼 북적대지는 않지만, 여전히 톨레도 시민과 관광객들의 중심지이며 매주 화요일에 전통 시장이 열리기도 합니다. 


톨레도의 중세도시 흔적이 남은 지역으로 들어가는 시발지이며 톨레도를 둘러볼 수 있는 꼬마 관광 열차가 운행되는 곳입니다. 또한 광장 주변 다양한 식당들이 밀집해 있어, 톨레도의 시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톨레도 소코도베르 광장 위치

대성당

 

오늘날까지 수석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톨레도 대성당은 이슬람 왕국 시절에는 회교사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1086년 알폰소 6세에 의해 톨레도가 수복 되었고, 이 회교사원은 알폰소에 의해 카톨릭 성당으로 개조되었습니다.


대성당의 건축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1227년 마르틴 선생 정도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정확한 건축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내부 트리포리움에 주어진 무데하르 양식으로 볼 때, 성당이 톨레도 고유의 지역적 영감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크기는 길이 120m, 넓이 60m 로 이루어진 톨레도 대성당 내부에는 화려한 장신구, 수많은 보석, 그림, 고문서, 오르간, 조각품 등 다양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 모든 면에서 명실상부한 카톨릭 성당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성당 정면을 보면 총 3개의 문이 존재하는데 가운데 있는 문을 “용서의 문”, 오른쪽에 있는 문을 “심판의 문”, 왼쪽에 있는 문을 “지옥의 문” 또는 “종려나무의 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입장표 가격: 


풀 코스 – 12.5 유로

박물관 – 10유로


 톨레도 대성당 위치

산토 토메 성당

 

산토 토메 성당에는 오르가스라는 백작의 예배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곤살로 루이스 이며, 일명 오르가스 백작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카스티야 왕국의 수석 공증인, 톨레도 지방의 귀족으로도 잘 알려진 오르가스 백작은 1323년 사망했는데, 일생동안 성당 기관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했으며, 신실하면서도 동정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소외된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장례식에 관한 하나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날 하늘에서 어거스틴 성인과 스테반 성인이 내려와 시신을 친히 매장하였으며, 이때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과 성인을 잘 섬기는 이는 이처럼 포상을 받느니라” 라는 말을 확실히 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르가스 백작은 자신의 유산을 산토 토메 성당의 가난한 성도들과 승려단에게 모두 넘겨줌으로, 사후 자신의 재산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쓰일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러한 오르가스 백작의 도움으로 산토 토메 성당은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였고, 시간이 흐른 뒤 장례식에 얽힌 전설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의 무덤 위에 그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엘 그레코라는 화가에 의해 그려지게 되는데, 이 그림에 이름은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약 9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그림은 지상의 매장 장면과 심판이 행해지는 비현실적인 천계를 세밀하게 묘사함으로 세계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입장표 가격: 

일반 – 2.8유로

10세 이하 – 무료

 

톨레도 산토 토메 성당 위치

엘 그레코의 집, 박물관

 

문헌상으로 엘 그레코(El Greco)는 비예나 후작과 에스깔로나 공작의 버려진 저택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이곳은 현재 성모승천 거리와 인근 집들이 있는 곳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엘 그레코의 집이라고 알려진 곳은 20세기 초 베가 인끌란 후작이 엘 그레꼬에 대한 기억과 그의 작품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페드로왕의 재무관이었던 엘 레비의 집이었다가 후에, 아르호나 공작부인의 소유로 넘어간 저택을 개조한 집입니다.


박물관에는 엘 그레코의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되 유명한 작품으로는 “톨레도의 전경과 그림”, “베드로의 눈물”, “성 베르나르디노 제단병품 그림’이 있습니다.


입장표 가격:


일반 – 3유로

토요일 14시 부터 무료, 일요일 무료


톨레도 엘 그레코의 집 위치

산 마르틴 다리

 

산 마르틴 다리(Puente de San Martín)의 건축시기와 건축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건축 추정 시기는 14세기 전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4세기 당시 서쪽 지역에 건축용 화강암 및 석탄 등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옮길 통행로 용도로 산마르틴 다리를 건설하였습니다. 

 

원래 현재의 산 마르틴 다리 옆으로 아랍시대에 만들어졌던 다리가 있었는데, 이는 1203년 홍수로 인해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그 흔적으로 일명 “까바의 목욕탕(Baño de la Cava)”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아랍 다리의 교각이 그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량이 위치한 곳이 마르틴 성인 교구와 가까우므로 그 이름을 “산 마르틴(San Martin)이라고 정하여, 오늘날까지 산 마르틴 다리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산 마르틴 다리는 뻬드로 1세와 그의 이복형제였던 엔리께 간에 일어난 내전 중에 심하게 훼손된 것이 떼노리오 대주교에 의해 재건된 모습입니다. 

 

이 다리를 재건할 당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다리 건축 책임자였던 건축가와 그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다리를 재건할 당시 건축가에게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공사가 다리 중앙의 아치를 마감할 때에 이르러 당시까지 만들었던 아치의 다리로는 다리가 대성당 건축용 돌을 싣고 가는 마차의 하중을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건축가는 몇 년에 걸친 노력과 엄청난 액수의 재정적 지원이 물거품이 되려고 하는 순간을 깨닫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또한 건축가 자신의 명성과 신용에 큰 타격을 주는 일이였으므로 크게 괴로워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끝내 자신의 부인에게 모든것을 털어 놓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부인은 남편을 위해 한가지 계략을 꾸미게 되는데, 부인은 한밤 중 건축중인 다리에 불을 놓게 됩니다. 

 

결국, 건축 중이었던 다리는 우연한 화재로 인해 다시 건축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이 건축가는 새로 다리를 설계할 때 하중을 충분히 견딜 수 있도록 27m, 넓이 40m의 초대형 아치를 설계하게 되었으며 현대의 인상적인 산 마르틴 다리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