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스페인의 느긋한 생활에 적응해 가던 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여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시에스타 시간을 피하여 저녁에 메르까도나에서 장을 봤다. 요리를 해서 친구들과 나눠먹었다.
매일 가계부를 쓰며 방값을 제 때 내고 집에 문제가 생기면 에이전시에 연락해 해결했다. 학교 내에서 소개해주는 여행 프로그램 등에도 참여했고 시험도, 조별과제도 그럭저럭 해냈다.
평화로운 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한 친구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펍을 빌려 생일파티를 하고 맛있는 음식과 샹그리아를 먹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높이가 약간 있는 계단 같은 곳에 서서 대화를 하다가 친구들이 대수롭지 않게 계단에서 점프하여 아래로 동선을 이동하였고, 나도 계단에서 점프를 시도했더랬다.
혼자서만 멋지게 착지 실패-.. 넘어지며 발을 접질렸다.
당시에는 그다지 아픈 느낌도 아니라서 ‘뭐 이정도야 괜찮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걸을 때마다 고통이 엄습해왔고 나중에는 한 발로 토끼처럼 뛰거나,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다.
친구들이 병원에 가볼 것을 권고했고 결국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병원에 가보게 되었다. 학교 내에 있던 병원이었는지, 학교에서 가까웠던 외부 병원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수업을 듣던 경영건물 에서 가까운 병원에 방문했다.
병원에 갈 때만 해도 힘들다거나 하는 감정은 전혀 없었다. ‘다칠 수도 있지 뭐’, 하며 덤덤하게 간호사가 시킨 대로 휠체어에 앉아 의사의 진료를 보기 위해 기다리던 때였다. 내 바로 옆에 어린 여자아이가 휠체어에 앉아있었고 부모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닌가.
갑자기 한국에 있는 부모님 생각이 나며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많이 아프지도 않았고,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니고 기다렸다가 진료받고 약 먹고 나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너무나 서러웠다.
아픈 곳을 스페인어로 제대로 설명 못하면서 괜히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평소 안하던 행동을 해서 발을 접질린 나도 원망스럽고 무엇보다도 갑자기 부모님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진료순서를 기다리는 내내 울었다. 그야말로 통곡이었다.
스페인에 와서 한 번도 힘들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나름대로 “괜찮다”라고 세뇌를 했던 생각이었던 걸까. 통곡을 하면서 나도 나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폭포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진료를 받으러 들어가니 의사들이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는지 2,3명의 의료진이 달라붙어 속사포로 스페인어를 쏟아냈다.
그제야 다리 삔 걸로 대성통곡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져 다시 정신을 부여잡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의사에게 내 상황을 설명했다. 의사는 내 발목에 붕대를 감아주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몇 주 후 아프던 발목은 감쪽같이 다 나았고 구석 천장에 남은 붕대와 약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참에 영국친구 사티쉬가 축구를 하며 발을 접질렸다며 남은 붕대와 약이 있으면 빌려달라고 찾아왔다.
난 미래에 혹시나 내가 다시 발을 삘 상황을 고려하고 걱정하며 “저기에 있어. 반만 가져가”라고 했고 사티쉬는 “넌 이제 다 나았고 다시 아플일은 없다고!” 하며 내가 천장에 넣어두었던 약과 붕대를 모조리 가져갔다.
친구의 말은 옳았다. 나의 발은 다 나았고 그 후로 아플 일은 없었다.
나름 타지에서 적응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고 확신했던 내가 나조차도 당황스럽게 무너져 내렸던 그 때 그 기분은 스페인에서 돌아온지 약 10년이 다 되가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안괜찮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래에 쓸 일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물건은 미련없이 버린다. 그래도 괜찮고 난 다시 아플일이 없으니까.